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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연구 (3) - 객관성의 신화와 공평성

by 전기운동화 2025. 10. 15.

다큐멘터리는 완벽히 객관적일 수 없지만, 공평하고 진실된 시선을 통해 현실을 해석하려는 예술적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독의 주관은 불가피하지만, 명료함과 균형 속에서 관객이 스스로 진실을 바라보게 만드는 힘이 다큐멘터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 회는 다큐멘터리의 균형에 관한 글 입니다.

주관적인/객관적인

많은 사람은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카메라가 정말로 현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가? 예를 들어 당신이 카메라를 어느 위치에 놓을지 결정할 때, 객관적인 카메 라 위치라는 것이 있는가? 당신이 언제 카메라를 작동하고 정지할 것인지를 객관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가? 촬영 화면을 검색할 때, 당신이 사용하고 싶은 화면의 진실성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가? 게다가 당신은 길고 흐트러진 쇼트들을 간결하고, 명료하며, 의미 있는 화면으로 편집해야 한다. 모든 것은 당신이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다큐멘터리가 객관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텔레비전이 때로 권위를 내세워 말하고, 대립되는 의견들의 균형을 잡아주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은 저널리즘의 전통인데, 가끔 잘못 사용하기도 한다. 1930년대에 평판이 좋았던 영국의 한 신문은 당시 독일에 불어닥친 심각한 먹구름을 공산주의자와 파시스트 사이의 사소한 분쟁이며, 두 진영 모두 잘못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 얼마 후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거나 피난을 가는 신세가 됐다. 지금 에 와서 생각하면, 전쟁 발발 세력에 대한 당시의 보도는 공평하지도 않았고 책임감도 없었다.

그냥 벤치에 앉아 방관하는 자세로 갈등을 보도할 수는 없다. 옳고 그름의 양 측면이 같은 비중으로 공평한 논쟁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논쟁은 정당함과 부당함이 동시에 작용하면서 엉겨 있다. 다큐멘터리는 정보의 덩어리들을 단순히 균형 있게 중계해서는 안 된다. 다큐멘터리는 역사가 진실을 입증 할 수 있도록 사건을 해석하고, 중요성을 드러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당신이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당신이 지적인 열정에 이끌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왜 기존의 매체들은 균형 잡힌 보도'를 선호하는가? 언론 기업들은 자신들의 실수가 드러나거나 정치적 편견에 사로잡혔다는 비난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관점'이라는 입장은 직원들과 편집진의 관점이 타인의 의견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연막전술이다. 그것은 특히 글쓰기나 영화 제작에서 회사 방침의 획일성을 은폐할 때 자주 사용한다.

 

가장 짧은 영화들도 삶의 복합성을 드러내고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암시할 수 있다. 장편영화들은 관객을 같은 사실에 대해 서로 다른 정보들로 이끌고, 감독이 스스로 결정에 도 달하듯 관객도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도록 만든다. 흥미롭게도 이런 방식은 민주주의 제도의 재판과 유사하다. 재판은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된 배심원 앞에 증거들을 제시한다. 다큐멘터리도 마찬가지다.

 

다큐멘터리는 주관적인 구성이다

당신은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없다. 당신이 선택한 중요 사실들, 논리, 힘, 강조점들을 가지고 사건을 개관할 수 있게 구성할 수 있을 뿐이다. 필연적으로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당신의 영화는 주제에 관해 광범위하게 사실을 수집하고, 설득력 있고, 믿을 만한 증거를 모으고, 그 자료들을 해석할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가 있을 때 비로소 진실성을 확보할 수 있다.

 

편집할 때 내려야 하는 많은 판단 중에는 당신을 잠 못 이루게 하는 윤리적 딜레마도 포함된다. 당신이 관객들에게 의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매체는 메시지의 일부이다. 메시지란 과연 무엇이며, 작품이 실제로 전달하는 영향은 무엇인지 한 번쯤 의심해야 한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당신이 구성한 영화가 당신의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있다.

 

공평성

만약 당신이 객관적일 수 없다면, 공평할 수는 있다. 당신이 단지 정보만을 쌓아 올리지 않고, 정보들이 서로 충돌하는 관점을 보여줄 수 있다는 뜻이다. 만약 당신이 의료 사고로 인한 고소사건을 이야기한다면, 의료진과 고통받는 환자 양쪽의 진술을 모두 사려 깊고 공감할 수 있도 록 다루는 것이 현명하다. 훌륭한 기자나 탐정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모든 사항을 각각 개별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 다른 관점에서 비교 검토해야 한다. 세상만사란 눈에 보이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비난받는 사람이라고 언제나 유죄인 것은 아니고, 비난하는 사람이나 방관자 라고 해서 무죄인 것은 아니다. 반대편의 입장을 심사숙고하는 것은 양쪽 중 어떤 입장을 지지하든지 창작자의 관심을 견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진실하지 못한 영화와 마찬가지로 진실한 영화도 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당신은 법정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게 될지도 모른다. 만약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이 작은 결점이라도 찾아낸다면, 그 사람들은 당신의 명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그것을 이용할 것이다. 마이클 무어 감독을 비판하는 진영은 그의 첫 작품인 <로저와 나 Rogor and Me〉(1989, 미국)에서 사건의 연대기적인 순서가 잘못된 점을 찾아냈고, 감독의 명 예를 실추시키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단순화가 아닌 명료화

다큐멘터리 감독은 명확한 소재에 별로 관심이 없지만, 자신이 선택한 소재를 명확하게 하려 는 욕망은 늘 있다. 네티 와일드가 만든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A Rusting of Leaves〉 (1990, 캐나다)는 필리핀의 인민주의 게릴라 운동을 용기 있고 설득력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에게 동조하는 감독의 천성과 믿음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미심쩍게 만든다. 감독이 지지하는 좌파 농민들은 우파 폭력배들과 투쟁할 때는 영웅적이지만, 이내 양 진영 모두 잔학 행위를 저지르고 너무 진흙탕이 되어버려서 영화는 윤리적 결백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한다.

이 영화가 공평해지려면 좌파의 추악한 면, 폭력을 통해 자유를 추구하는 역설을 드러내야 한다. 물론 감독은 게릴라들이 어린 정보원을 재판하고 처형하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공평해지려고 한다. 하지만 관객은 주위에 카메라가 없었더라도 그런 식의 재판이 있었을까'라고 의심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가 정확하고 진실에 가까우려면, 정확함과 진실성이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영화를 처음 본 관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예측하고 관객이 언제 영화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지 알기 위해선, 영화의 논쟁점들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논쟁이 미묘할수록, 한편으로는 명료함과 단순함 사이에서 또 한편으로는 실제 생활의 복잡함과 모호함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