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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마/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연구 (6-1) - 다큐멘터리라는 명칭과 역설

by 전기운동화 2025. 10. 16.

다큐멘터리 (documentary)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쓰여졌을까요? 그 명칭에 대한 사람들과 기대와 현실은 이 장르가 발현한 초창기부터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객관성, 진실, 리얼리즘 등이 다큐멘터리를 정의하는 키워드라면, 현실의 사건을 철저하게 재현하여 공감을 불러일으킨 극영화는 객관성, 진실, 리얼리즘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큐멘터리라는 명칭과 이에 대한 기대를 둘러싼 역설은 끝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큐멘터리라는 명칭과 역설

다큐멘터리라는 용어는 선전 심리학에 관심이 많은 스코틀랜드 사회과학자 존 그리어슨과 플래허티 감독이 1920년대 중엽에 나누었던 대화에서 언급되기 시작했다. 그리어슨은 플래허티가 만든 <모아나> (1926, 미국)를 논평하면서 그 의도로 보아 모아나는 '다큐멘터리'라고 불러 마땅하다고 말했다. 그는 같은 이유로 <북극의 나누크>도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플래혀터는 서정적인 원형을 만들어내는데 집착한다고 공격받고 있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의 창시자라는 명예는 쉽게 차지할 수 없었다. 이러한 공격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플래허티는 자신의 황량한 어린 시절을 잊지 않은 낭만주의자였다. 심지어 그의 많은 작품에서는 아예 소년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플래허티의 인간주의와 시 적인 화면을 존경하면서도, 실제의 인물들을 찍기보다는 영화에 어울리는 가족들을 선별한 것은 개탄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플래허티가 <아란의 남자> (1934, 미국)를 만들자 비판자들은 더욱 격분했다. 그가 아란 섬을 빈곤하게 만든 부자 지주들의 대저택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감독의 관심은 사회의 구조적인 착취로 인한 섬사람들의 희생이 아니라 그들이 자연과 벌이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플래허티에게 퍼붓던 비난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된다: 다큐멘터리적인 진실은 무엇인가? 카메라는 객관적인가? 우리가 보는 것이 진실인가? 우리가 보는 것이 진실의 정신을 나타 내는가? 우리는 누구의 진실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우리가 어떤 의미를 만들기 위해 화면을 병치시킨다면 편집된 화면은 무엇을 근거로 진실하고 혹은 진실하지 않은가? 우리는 사회과학자처럼 객관적일 수 있는가?

 

플래허티가 했던 것처럼 관객의 정서를 환기시키려면 언제 시적이고 감정적인 수단을 사 용하는 것이 적절한가? 관객을 설득할 때 영화의 어떤 부분을 미학적으로 사용하여야 하는가?